새벽 2시, 나는 무엇을 위해 일하고 있는가
주도성과 경계 사이에서 길을 잃은 PM의 밤
또 잠이 안 온다. 내일 아침에 또 한숨을 쉬며 회사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언제부터였을까, 이렇게 된 게. 아, 맞다. 6개월 전부터였지.
대표님이 피봇을 결정했던 그날. 3개월 동안 밤낮없이 만든 로드맵이 한순간에 휴지조각이 되었던 그날 말이야. 시장 분석하고, 개발팀과 조율하고, 우선순위 하나하나 설정했던 모든 시간들이 "우리 방향을 바꿔볼게요"라는 한 마디로 사라져버렸다.
배신감이었어. 솔직히 말하면. 내가 그 사람을 얼마나 믿고 따랐는데...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건 대표님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스타트업이라는 환경 자체가 문제였을까? 아니면 둘 다?
매번 0에서 다시 시작하는 느낌. 이번이 벌써 세 번째야. 처음 두 번은 그래도 뭔가 만들어가는 재미가 있었는데, 이번엔 그냥... 허무해. 왜 이번엔 다를까? 뭐가 달라진 걸까?
아마 내가 달라진 것 같아. 예전엔 "뭐든 해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는데, 지금은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자꾸 의심이 들어. 대기업 간 동기들 SNS 보면 부럽기도 하고. 안정적인 연봉, 체계적인 프로세스... 나는 뭐하고 있는 거지?
PM이면서 QA도 하고 CS도 보고... 경계가 없어. 이력서 쓸 때도 내 직무가 뭔지 모르겠어. PM이라고 하기엔 너무 잡다하고, 그렇다고 다른 타이틀을 쓰자니 애매하고.
그런데 또 웃긴 게, 대기업으로 가면 답답할 것 같기도 해. 내가 주도적으로 움직이는 걸 좋아하는데, 위에서 내려오는 지시만 따르면 숨 막힐 것 같거든. 근데 지금은 그 주도성이 오히려 독이 되는 느낌이야. 모든 걸 다 해야 한다는 부담으로 돌아오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거야. 스타트업에서는 경계 없는 업무에 지치고, 대기업으로 가자니 주도성을 발휘할 공간이 없을 것 같고.
그럼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뭘까? 잠깐... 생각해보니 답이 보이는 것 같아. 주도성을 발휘할 수 있으면서도 경계가 명확한 환경. 그런 게 있을까?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뭘 원하는지는 이제 좀 보이네.
5년차 PM이 새벽 2시에 내린 결론. 내 강점과 환경이 어긋나고 있다는 것. 번아웃의 진짜 이유는 업무 과부하가 아니라 이런 딜레마였구나.
이제 좀 자야겠다. 내일 아침에도 한숨은 나오겠지만, 적어도 왜 한숨이 나오는지는 알겠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오늘밤은 의미가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