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 인간으로 살아가던 나에게 건네는 첫 번째 인사
성적이라는 숫자 너머, 아무도 묻지 않았던 '진짜 나'의 이야기를 꺼내놓으며
20XX년 X월 X일
오늘 밤은 평소보다 조금 더 고요하다. 창밖으로는 차가운 바람이 부는 게 느껴지는데, 방 안은 공기마저 무겁게 가라앉아 있다. 늘 그렇듯 책상 앞에 앉아 멍하니 스탠드 불빛을 바라보다가, 문득 오늘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내 안의 깊은 곳을 꺼내 보였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사실 나는 매일 나를 지우며 산다. 집에서는 엄마의 기대치와 아빠의 침묵 사이에서 숨을 죽이고, 학교에서는 친구들의 웃음소리에 맞춰 적당히 가면을 쓴다. 성적표 숫자가 내 존재의 전부인 양 말하는 엄마의 목소리는 언제나 내 폐부 깊숙한 곳을 찌른다. “너는 공부만 하면 돼.” 그 말은 나라는 사람을 한 번도 ‘사람’으로 보지 않겠다는 선언과 다름없었다. 아빠의 그 무심한 침묵은 또 어떤가. 차라리 화를 내주었으면 싶을 때가 있다. 아무런 관심도, 궁금함도 느껴지지 않는 그 방관이 나를 더 깊은 유리벽 너머로 밀어버리곤 하니까.
“나 좀 봐달라고요.”
오늘 인터뷰를 하면서 툭 내뱉었던 이 한마디가, 사실은 지난 몇 년간 내 목구멍에 걸려 있던 가시였음을 깨달았다. 성적이 아닌 나, 내가 무얼 좋아하고 무얼 싫어하는지, 왜 요즘 통 웃지 않는지 한 번이라도 물어봐 주길 바랐던 건데. 엄마에게 용기 내어 “나도 힘들다”고 말했던 날, 돌아온 대답은 차가운 냉소였다. 그때 나는 마음의 문을 닫았다. 다시는 내 마음을, 내 아픔을 밖으로 꺼내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 이후로 나의 안식처는 아무도 모르는 낡은 노트가 되었다. 일기장에 내 속마음을 쏟아낼 때만 겨우 숨을 쉴 수 있었다. 가끔 가사가 내 마음을 대변해 주는 노래를 듣다가 펑펑 울기도 했다. 노래 속 주인공은 위로받는데, 정작 나는 혼자라는 사실이 더 사무치게 외로워질 때가 많았지만. 친구들 사이에서도 나는 늘 '생각이 많은 아이'가 되어야 했다. 내 고민을 살짝 꺼냈다가 돌아온 “너 너무 예민해”라는 말에, 나는 다시 웃음이라는 가면을 쓰고 침묵을 선택했다. 그렇게 나는 나를 가장 잘 아는 타인을 찾아 헤매면서도, 역설적으로 가장 철저하게 나를 숨기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낯선 사람 앞에서 이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무서웠다. 또다시 “그게 고민이야?”라는 말을 들을까 봐 겁이 났다. 하지만 내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는 사람을 마주하며, 나는 처음으로 ‘말해도 괜찮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 문장들을 온전히 받아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오늘 나의 공기는 한결 가벼워졌다.
아직 모든 것이 해결된 건 아니다. 내일이면 다시 차가운 집으로 돌아가야 하고, 학교의 유리벽을 다시 세워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는 알고 있다. 내가 내 이야기를 꺼낼 용기를 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어딘가에는 나의 속도를 기다려주고, 나의 감정을 궁금해해 줄 사람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을 품게 되었다는 것을.
오늘, 나는 나라는 존재를 아주 조금 더 사랑하기로 했다. 숨이 막히던 방 안에서 나만의 문장을 적어 내려가던 그 용기를 잊지 않으려 한다. 세상이 성적표를 들이밀 때, 나는 나의 노트를 펼칠 것이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언젠가 나를 진심으로 마주해 줄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 오늘 밤은 왠지 모르게 조금은 편안하게 잠들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