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자 없는 오케스트라, 나의 첫 음표
30년 교직을 내려놓은 **, '오늘'을 다시 쓰다
매일 아침 7시, 눈은 저절로 떠졌다. 30년간 각인된 습관의 무게였다. 낯선 천장을 보며 문득 깨달았다. 나는 평생 남의 문장에 밑줄 긋는 법을 가르쳤지만, 정작 내 삶엔 그 흔한 밑줄 하나 없었구나. 텅 빈 교실 같은 묘한 적막감이 밀려왔다.
골목길의 길고양이. 30년 동안 학교만 오가던 눈에는 보이지 않던 풍경이었다. 나직이 말을 걸어도 녀석들은 도망가지 않았다. 어쩌면 그들도 알았을 테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바쁜 '위험한 사람'이 아니라, 그저 한가롭게 배회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60년 가까이, 나는 남이 써준 악보대로만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단원 같았다. 부모님이, 사회가 지휘봉을 들었지. 그런데 어느 날, 지휘자가 홀연히 퇴근해 버렸다. 악보 없는 무대 위에 홀로 서니, 막연한 두려움과 함께 생경한 자유의 선율이 흐르는 듯했다.
아이슬란드 오로라 영상을 밤새도록 보고 있자면, 기묘한 상상에 사로잡힌다. 저 춤추는 빛 아래서 시조 한 수를 읊조리면 어떨까. 국어교사였던 자의 해묵은 습관일까. 딸은 아빠가 이상해졌다 했지만, 이 꿈은 내 안의 가장 벅찬 진심이었다.
35년 만에 아내에게 처음으로 편지를 썼다. 식탁 위에 놓아두고 도망치듯 방으로 숨었다. "당신 어디 아파?" 아내의 농담 섞인 목소리. 30년간 칠판에 쓴 수천 번의 글자보다, 이 편지 속 단어들이 더 떨렸다. 분필은 지워지지만, 편지는 그렇지 않으니까.
눈에 띄는 변화는 없어도, 미묘한 흐름이 생겼다. 아내가 먼저 산책을 제안하고, 나는 35년 만에 설거지통에 손을 담근다. 아무 말 없이 행주를 건네는 아내. 그것이 우리 세대의 가장 진솔한 대화법이리라. 무심한 듯 따뜻한 공기가 부엌을 감쌌다.
가장 중요한 것. 바로 '오늘'이었다. 미래를 위해 오늘을 소비하던 지난날은 사라지고, 오직 지금 이 순간만이 오롯이 남았다. 길가의 은행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 예전엔 그저 배경이었던 나무가, 이제는 살아 숨 쉬는 존재로 다가왔다. 내가 드디어 속도를 줄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