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언어 사이, 이름 없는 ‘경계인’의 다정함에 대하여
언어를 번역하며 스스로의 문법을 찾아가는 고독하고도 고귀한 여정
매일 아침, 나는 모니터 앞에 앉아 낯선 세계로 여행을 떠난다. 영어라는 거대한 바다를 건너 한국어라는 익숙한 땅으로 문장들을 옮기는 일. 5년 차 프리랜서 번역가로 살아온 내게 이 행위는 단순히 언어를 바꾸는 기술이 아니라, 매일 조금씩 나의 영토를 넓히거나 혹은 잃어버리는 과정에 가깝다.
어느 날은 영어 문장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한국어라는 다리를 건너뛰고, 그 문장의 의미를 영어 그대로 이해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 순간 기묘한 소외감이 찾아온다. 한국 사람인 나조차 한국어로 사유하는 것보다 영어의 문법이 더 편하게 느껴질 때, 나는 과연 어디에 서 있는 사람인가. 한국과 영어, 그 사이의 어디쯤에 부유하며 어느 쪽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 이방인이 된 것만 같아 문득 두려워진다.
번역가는 타인의 목소리를 대신 내는 사람이다. 타인의 생각, 타인의 감정, 타인의 세계를 내 언어로 번역하는 동안 정작 내 목소리는 침묵 속에 잠긴다. 그 고요함이 깊어질수록 스스로의 문법을 잊어버리는 순간들이 잦아진다. 세상의 모든 언어를 건너다니지만, 정작 내 안의 '나'를 향한 언어는 길을 잃은 상태. 그 외로움은 물리적인 고독보다 훨씬 더 날카롭고 서늘하다.
그럴 때 나를 현실의 땅으로 끌어내리는 건 아주 사소하고도 원초적인 의식들이다. 부엌에서 된장찌개를 끓이는 시간.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뚝배기 소리와 함께 나직이 한국어로 혼잣말을 내뱉을 때, 비로소 나는 내가 누구인지 감각한다. 찌개의 구수한 향기와 한국어의 발음이 섞이는 그 짧은 순간, 나는 다시 나의 온도로 돌아온다. 나라는 사람을 지탱해 주는 나침반은 거창한 철학이 아니라, 이토록 따뜻하고 평범한 일상의 냄새 속에 있었다.
가끔은 그 나침반마저 방향을 잃는 밤이 있다. 며칠간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고 타인의 문장만 붙들고 있다가 거울을 마주할 때면, 낯선 내 얼굴을 향해 무심코 '괜찮아'라고 말해본다. 영어의 'I'm fine'이 건조한 상태의 보고라면, 한국어의 '괜찮아'는 긴 시간을 견뎌온 마음을 다독이는 다정한 안부다. 그 한마디에 덜컥 울음이 터질 때, 나는 비로소 깨닫는다. 내가 겪고 있는 이 흔들림은 정체성을 잃어가는 과정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을 더 깊게 이해하려는 안간힘임을.
누군가는 나를 '경계인'이라 불렀다. 두 세계 사이에 끼어 외로워하는 존재가 아니라, 어느 곳에든 자유롭게 닿을 수 있는 연결자. 이 말이 묘하게 위로가 된 건, 그동안의 방황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증명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때때로 원문의 행간에서 작가의 의도를 낚아채 한국어라는 그릇에 담아낼 때, 나는 비로소 두 언어를 잇는 다리가 된다. 그 찰나의 보람은 내 언어의 빈틈을 나만의 색으로 채워 넣는 유일무이한 희열이다.
앞으로도 나는 번역이라는 고독한 여행을 계속할 것이다. 여전히 두 언어 사이에서 길을 잃고, 때로는 내가 누구인지 잊어버린 채 허우적거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혼란조차 내가 세상을 더 넓게 껴안고 있다는 증거임을. 밤마다 거울 속의 나를 향해 뱉는 서툰 위로가 언젠가는 내 삶을 지탱하는 가장 단단한 문장이 되리라는 것을.
오늘도 나는 걷는다. 동네를 산책하며 사람들의 일상을 조용히 관찰하는 시간, 카페에 앉아 세상의 소음을 듣는 시간. 그 모든 과정이 다시 나를 '나'라는 언어로 돌아오게 할 것이다. 언어의 경계에 서 있다는 건, 결국 세상 모든 다정함을 한꺼번에 받아낼 준비를 하는 일과 같으니까.